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엔비엔푸 전투 (문단 편집) ==== 소강상태 (1954년 3월 15일 ~ 30일) ==== || [[파일:5e727120385a79c790dc7ba7f8739f2d.jpg|width=100%]] || [[파일:545b90f73e551449d9003f1b45a77617.jpg|width=100%]] || 물론 프랑스군도 놀고 있던 것은 아니라서 전투 초기에는 매일 10회 이상의 공습을 퍼붓고 보급물자는 물론 하루 100명 이상의 증원병력을 [[낙하산]]으로 투입하는 등 지속적인 증원을 했다. 하지만 워낙 베트민군의 숫자가 많고 정글과 산악이 합쳐진 지역에서 적의 규모와 위치를 알 수 없는 상황에는 답이 없었다. 게다가 베트민군이 투입한 중화기의 숫자도 상당해서 요새의 화력으로는 대응하기 힘들었다. 평소 베트민군 포병화력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던 프랑스군 포병지휘관 샤를 피로 대령은 결군 압도적인 적 포병화력에 대응하지 못한 점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 3월 16일 수류탄으로 자살했다.[* 이에 대해 상술하면 디엔비엔푸 요새는 험준한 산악에 쌓인 분지에 위치한 요새이기에 고지를 빼앗기면 요새 방어력이 크게 떨어진다. 그러나 상대를 얕잡아본 프랑스군은 높은 곳을 점령해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무시했다. 그래서 주변의 산악지형에는 소수의 부대만 배치했는데 베트민이 저 정도의 포병전력을 산속에 배치할 줄은 몰랐다. 또한 책임감을 느꼈다고는 해도 아직 전투가 진행 중인데 대령씩이나 되는 지휘관이 자살한 것 -설령 포병전력이 거의 전멸했어도- 은 지휘관을 믿고 따르던 부하들에게 있어 대단히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참고로 수류탄으로 자살한 건 한쪽 팔을 잃었기 때문에 권총을 쏠 수 없어서였다. 이로 볼 때 이미 상당한 PTSD를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 [[대공포]]만 80여문 이상이었으므로 공습하는 프랑스 공군 항공기에 대해 맹렬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전투가 진행되면서 프랑스 측 항공 전력도 날로 축소되었다.[* 비슷하게 [[케산 전투]]에서도 역시 케산 주변에 37mm 대공포들을 깔아놓고 접근하는 미군 항공기를 노렸으나 구형 프롭기로 깔짝 대던 프랑스군과 달리, 마하 1~2를 넘나드는 제트기들을 선두로 케산 기지 일대를 황무지로 만든 미군에게 큰 피해를 주진 못했다.] 3월 16일 오후 하노이 프랑스극동원정군 총사령부는 제6식민지 공수대대(6 BPC)를 디엔비엔푸에 증원했다. [[파일:external/www.rims.kr/9086.jpg]] ▲ 1954년 3월 전투 상황. 북쪽의 외곽기지 3개가 전부 베트민 수중에 넘어갔다. 결국 중앙의 4개 기지와 남쪽의 이사벨 기지만 남아서 베트민의 총공세를 맞게 되었다. 전투 개시 며칠 만에 북쪽의 3개 진지가 모두 베트민에게 넘어가자 프랑스군에게 남은 것은 중심부의 4개 진지[* 위의 지도에서 주황색 원 속의 4개 진지]와 남쪽에 멀찍이 떨어진 1개 진지였다. 베트민은 3월 23일 남부지역 PA 이사벨과 연결된 도로를 완전히 차단하여 PA 이사벨은 병력 증원 없이 단독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민은 잘 방어되고 있던 남쪽 진지를 본진과 차단시킨 채 본진에 맹공을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위태위태한 상황에서도 간신히 붕괴를 막아내었다. 3월 28일 PA 클로딘에서 제8타격공수대대와 하노이에서 증원된 제6식민지공수대대가 반격을 개시하여 적의 공격 기세를 꺾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